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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조선의 5대 국왕 문종

by º㉾♧㉾º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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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5대 국왕이며 조선 최초의 장자 출신 국왕이고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 사이의 8남 2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문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종

문종

1414년 11월 15일 출생하였으며 1450년 4월 8일, 37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문종은 소헌왕후와 세종의 3년상을 연달아 치르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2년 2개월 말에 어린 단종을 남겨두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며 2년 2개월의 매우 짧은 재위기간 때문에 탈상도 못하고 붕어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세종 말기 1442년부터 7년 8개월 동안 문종의 대리청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통치기간은 9년 10개월 정도 됩니다.

문종의_친필

문종의 생애

세종 3년(1421), 문종의 나이 7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생 나이에 세종을 대신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하마연을 베풀었는데 사신들이 문종의 외모를 보고는 립서비스를 담아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奇絶)하므로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라고 찬미하기도 했다. 문종은 체격이 크고 수염이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다고 합니다. 당대의 미의 기준으로 친다면 비슷한 시기 명나라의 홍희제와 비슷한 외모일 수도 있겠네요. 홍희제 역시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어진을 보면 관우와 같이 큰 풍채와 풍성한 수염 있는 외모였기 때문. 그 밖에도 학문에도 능해 세자 책봉 3년 만인 10살 때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다음 해에는 바로 맹자를 배우는 등 경서들을 빠르게 익혀나가 세종과 사대부들의 기대를 한껏 높여나갔습니다.

 

스물이 넘어서는 아버지 세종을 직접 호종(護從)하며 실무를 도왔다. 이때부터 이미 유교적 지식뿐만 아니라 역산과 천문에 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세종 시기 과학분야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가 다름 아니라 세자 시절 문종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계한 작품입니다.

 

여담으로 이때 당시 아버지인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도 깊게 관여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데, 대표적으로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에서도 주된 이유 중 하나로 당시 대리청정 중이던 동궁(東宮, 문종)이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음에도 언문에 지나치게 크게 관심을 쏟고 있다고 우려하는 내용이 있으며, 이에 대해 세종은 "세자가 국가의 서무에 있어서 세미한일도 첨예하게 관여하는 것이 마땅하며 언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라고 반박한다. 또한 성삼문이 저술한 직해동자습서문에서 훈민정음은 세종과 문종의 작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창제 과정에서 깊게 관여를 했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문종은 기록 면에서도 불운했다. 조선의 27명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재위 기록이 일부 소실된 임금입니다. 문종실록 열세 권 가운데 11권(음력 1451년 12월 ~ 1452년 1월)이 사라졌는데 '전주사고'의 문종실록 11권이 표지는 11권이었지만 내용은 9권으로 잘못 들어가 있었습니다. (책을 필사하고 표지를 붙이던 와중에 9권과 11권의 표지가 바뀐 것으로 추정) 그러던 중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사고와 실록들이 죄다 불타면서 9권 표지를 단 11권을 포함한 나머지 문종실록 11권이 모두 사라졌고,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 실록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문종실록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본이 모두 사라져서 복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 후기였다면 내용을 짐작할 승정원일기라도 남아 있었겠지만 전기 승정원일기는 전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추측밖에 할 수 없습니다.

 

사망한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단종이 '문종'(文宗)이라는 묘호를 올렸습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안에 있는 현릉(顯陵)입니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와 안장되어 있는데 동원이 강릉 형식의 능묘입니다. 본래 현덕왕후 권 씨는 1441년(세종 23년)에 승하해서 경기도 안산시의 소릉(昭陵)에 묻혀 있었고 중종 때인 1513년(중종 8년) 왕후로 사후 복위되었을 때 합장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현릉의 비석 제작을 감독하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을 죽였는데 이들을 참살한 장소 역시 형의 무덤이었던 현릉(顯陵)이었습니다.

 

왕의_상징

문종의 평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아버지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성군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재위 2년 2개월 만에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을 어린 단종에게 떠넘기고 과로와 여러 요인으로 작용된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종이 아주 단명한 왕은 아닌데, 문종은 성종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세종의 임기 마지막 8년 기간에는 강무나 종묘제례 같은 국가 중대사까지도 모두 다 대신하는 등 사실상의 국왕 업무를 권한대행했지만 실제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몸이 약하고 요절했다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오랜 기간 세자로 있었고, 차기 국왕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라는 정통성도 완벽했기 때문에 그 위세도 대단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문종이 몇 년만 더 오래 재위했다면 단종의 보위는 안정화에 접어들었을 것이고, 계유정난과 같은 끔찍한 살육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적어도 단종은 세자 시절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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